- 속(續) 제1과 제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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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生)다는 말은 그저 막연히 사는 사람의 생(生)을 의미하고 생활(生活)한다는 말은 그저 막연히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 어떠한 난관이라도 돌파하면서까지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생(生)을 이름이라고 한다면 수택이의 지금의 생은 이 후자(後者)에 속할 것이다. 사실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그는 남이 살아 있듯이 그저 막연히 살아왔던 것이다. 남이 살듯이 살아왔고 보니 남이 죽듯이 또 죽었어야 할 것이로되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사실은 그가 지금까지 그만큼 살기 위해서 애를 썼다는 증좌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죽듯이 그런 모진 병에 걸리지 않았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수택 자신에게는 적이 미안한 일일지 모르나 지금까지의 그의 생에 대한 태도란 이런 정도에서 몇 걸음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도 하루에 밥 세 끼니를 얻기 위해서는 실로 피비린내나는 노력을 해왔다 할 것이다. 동경 유학 때는 실로 일곱 끼니의 때를 거르면서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했었고 일금 오십원의 월급 봉투를 위해서는 여름 아침의 그 단잠도 희생을 해왔고 X광선을 비추면 월식하는 달처럼 일부분이 뿌예진 폐를 가지고도 한결같이 오년이란 긴 세월을 버티어왔다. 그는 먹고살기 위해서는 젊은 결기로서는 도저히 참기 어려웠을 모든 굴욕 앞에서도 인종(忍從)의 덕을 지켜왔으며 한 때의 찬거리를 사기 위해서 마포에서 광화문까지의 먼 거리를 터덜터덜 걷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살아 있는 그 누구나가 사는 방법이요 또 살아나갈 방법이다. 좀 더 잘산다. 보다 더 값있게 산다. 좀 더 깨끗하게 살고 보다 더 건실한 생활자가 된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한 구원한 이상처럼만 생각해왔었다. 그리고 그것은 위대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요 자기와 같은 범인에게는 생각할 수도 없는 지난한 일이라 했었다.
--- “흙의 노예(奴?)” 중에서
‘흙의 작가’라 불리는 이무영(李無影, 1908~1960)은 한국 현대 소설사에서 농민, 농촌의 테마를 가장 먼저 창작 현장으로 이끌어낸 문제적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소년기를 충북에서 보낸 그는 1920년 서울에 오면서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다. 문학에의 큰 뜻을 품고 시작한 일본 유학에서 그는 가토오 다케오에게 문학 수업을 받았다. 귀국한 이후 신문사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소설가, 극작가로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였다. 본격적으로 농민 소설을 쓰면서는 농부들의 세계를 유머러스하고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농촌 소설의 선구자’라고 불렸다. 한편 1943년 친일 소설 「토룡」과 「향가」 발표, <매일신보>에 친일 논설을 실은 행적 등으로 2002년 민족단체가 발표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 포함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