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실 해밋, 로스 맥도널드와 더불어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미국 작가 레이먼드 손턴 챈들러. 그는 1932년 대공황으로 일자리를 잃고 저가의 대중소설 잡지인 펄프 매거진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 자신도 소설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늘 가슴속에 품어 왔던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펼쳐 단편 「협박자는 총을 쏘지 않는다」를 쓴다. 5개월에 걸쳐 18,000단어를 사용하여 쓴 이 글은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의 산실이었던 《블랙 마스크》지에 180달러에 판매되고, 마흔 중반이 넘은 다소 늦은 나이에 그는 작가로 데뷔하게 된다. 5년간 공들여 쓴 첫 장편소설 『빅 슬립』(2005년 《타임》지 선정 20세기 100대 영어 소설)이 성공하고, 이어 『안녕 내 사랑』, 『기나긴 이별』(《히치콕 매거진》 선정 세계 10대 추리소설) 등을 썼다. 1930~1940년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분위기가 살아 있는 그의 작품은 할리우드의 성장과 함께 대부분이 영화화되었다.
“위대한 미스터리는 캐릭터 그 자체”라고 한 챈들러는 셜록 홈스와 함께 탐정의 대명사가 된 ‘필립 말로’ 캐릭터를 창조했다. 중절모에 트렌치코트를 입고 담배를 문 냉소적인 이 인물은 후대 탐정 캐릭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하라 료, 마이클 코널리 등 수많은 작가들이 레이먼드 챈들러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공언한 바 있는데, 특히 폴 오스터는 “레이먼드 챈들러는 미국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 냈고, 이후 우리에게 미국은 결코 예전처럼 보이지 않았다”라고 극찬했다. 챈들러가 구사한 문체와 그의 의외의 직유는 ‘챈들리스크Chandleresque’라는 단어까지 탄생시켰고, 하드보일드는 하나의 장르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고독하고 쓸쓸한 서정성에 날카로운 비유가 살아 있는 완성도 높은 작품을 남겨 탐정소설을 단순한 오락물에서 문학의 자리까지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 대중문학의 영역을 확장시킨 챈들러는 아내가 죽은 후 과음을 하며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1959년 70세의 나이로 캘리포니아에서 사망했다. 그는 8편의 장편소설과 25편의 단편소설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