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파벨은 항구도시 타간로크에서 잡화점을 운영했다. 그는 자식들에게 새벽 기도와 성가대 활동을 강요했는데, 그것이 작가의 유년 시절의 지각(知覺)을 지배하게 된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파산해 온 가족이 모스크바로 떠난 후 체호프는 타간로크에 혼자 남았다. 이때부터 체호프는 독립심과 가족 부양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갖게 되었다.
1879년 체호프는 모스크바에서 의과대학에 입학한 후, ‘안토샤 체혼테’, ‘내 형의 아우’, ‘쓸개 빠진 남자’와 같은 필명으로 생계를 위해 유머 잡지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초기 단편들은 쉽게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소품들이 대부분이었다. 1885년 12월 체호프는 레이킨의 초대를 받아 페테르부르크로 가게 된다. 거기서 드미트리 바실리예비치 그리고로비치와 알렉세이 세르게예비치 수보린을 알게 된다. 1886년 초 그리고로비치는 체호프의 <사냥꾼>을 읽으면서 그의 위대한 재능이 소모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 작가는 체호프에게 재능을 아낄 것과 굳건한 문학적 입장을 가질 것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낸다. 이 충고 이후 1887년 봄 무렵부터 체호프는 이전과는 다른, 보다 객관적인 작가로 변모하게 된다. 한편으로 수보린은 체호프에게 고정 지면을 내주었고, 경제적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그의 경제적 후원 덕택에 체호프는 원고 마감 시간과 주제의 제약과 같은 현실적 부담에서 벗어나 전업 작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892년 모스크바 근교의 멜리호보에 정착한 작가는 왕성한 창작열로 <6호실>(1892), <문학 선생>(1889∼1894), <롯실트의 바이올린>(1894), <대학생>(1894), <3년>(1895), <다락이 있는 집>(1896), <나의 삶>(1896), <갈매기>(1896), <농군들>(1897)과 같은 후기 걸작들을 집필했다. 한편으로 농민들을 무료로 진료하고, 톨스토이, 코롤렌코와 함께 기근(饑饉)과 콜레라 퇴치 자선사업을 펼쳤으며, 학교와 병원 건립 등 사회사업에도 참여했다. 1898년 지병인 결핵이 악화되어 크림 반도의 얄타로 이사한 체호프는 우울과 고독 속에서 나날을 보냈는데, 모스크바 예술극장 여배우 올가 크니페르와의 결혼으로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용무가 있어서>(1899), <사랑스러운 여인>(1899),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1899), <바냐 외삼촌>(1899), <골짜기에서>(1900), <세 자매>(1901), <약혼녀>(1903) 등을 발표했다. 1904년 1월 17일 체호프의 생일에 초연된 <벚나무 동산>과 창작 25주년 축하연은 그에게 무한한 기쁨을 주었지만, 그의 건강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같은 해 6월 독일 바덴베일레르(Баденвейлер)로 아내 올가 크니페르와 요양을 떠나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